60년 畫道, 感動的 色彩와 想念의 世界
光州美術 지켜온 元老, 金永太 畫伯

김경희 / 한국언론재단 미디어교육팀

畫家 自然을 가르쳐주는 사람
“산책을 자주하고 自然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藝術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畫家는 自然을 理解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畫家의 의무는 自然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만일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그건 藝術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한 藝術家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作業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共感을 얻게 된다”(빈센트 반 고흐). 짧은 生涯를 태양처럼 뜨겁게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태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늘날 藝術家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주옥같은 내용이 많이 있다.
조급하게 앞만 보고 내달리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명제이기도 하다. 멀리 내다보기보다는 한순간의 영화에 만족하고 자신의 內面을 살피는 일보다 눈부신 성과를 자랑하는데 급급한 藝術家들이 많은 이 시대에 느긋하게, 긴 호흡으로 自身의 길을 걷는 作家를 만나는 것은 그래서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地域 美術家의 산 證人
모름지기 진정한 藝術家라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외길 그림 인생을 살아온 金永太畫伯.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지만 정신적인 즐거움을 자신의 최대 재산으로 간직하면서 호방하면서도 중후한 화풍을 견지하고 있는 선생은 湖南 畵壇의 代表的인 元老이다.
조선대 미대 1회에 美協 創立會員 등 선생의 하나하나가 地域 美術史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地域 美術界의 산 證人이기도 한 선생이지만 당신의 이름 석자 알리는 일에는 참 무심하게 살아왔다.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성격인지라 언론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고 “묵묵히 내 갈길 가면 그뿐”이라는 생각에 그림 이외의 돈버는 일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문화부기자 생활 12년동안 선생을 찾아볼 기회가 없었으니 새삼 죄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일년에 수도없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잘 나가는 藝術家 대신 큰바위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견지하며 한 우물을 파는 진정한 藝人을 만나러 가는 길. 소매 끝에 파고드는 청량한 기운과 길가에 늘어선 코스모스의 하늘거럼, 어제보다 한 뼘 올라간 비취색 하늘이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8월말의 도심은 한여름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늘 그랬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自然이다. 季節에 따라 짙어졌다가 연해지기도 하고, 말고 깨끗하기도 하고 소슬하고 쓸쓸하기도 한 李節의 變化앞에서 사람들은 외로워하기도 하고 겸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自然을 그리는 畫家는 고흐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自然을 더 잘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 審美眼안을 갖고 있어야 하며 치열한 作家的 탐구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自然만큼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제라늄 활짝 핀 아담한 畵室
소태동에 위치한 선생의 집은 아담한 2층 한옥이었다. 집앞 공터에 정담을 나누듯 채송화 무리가 피어있고 마당에는 종려나무를 중심으로 나팔꽃과 창포, 비파, 담쟁이넝쿨 등 온갖 꽃나무들이 무리지어 피어 늦여름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2층에 오르자 옥상 난간 켜켜이 놓인 제라늄화분이 찾는 이를 반긴다. 作業室에서 매미소리 요란한 庭園을 내려다보니 온통 싱그러운 초록빛 잔치다. 선생의 편안한 미소와 對象에 대한 호방한 시선이 이같은 넉넉한 작업환경에서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畫室 문을 열자 작업중인 제자들의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고 모서리며 탁자에는 모두 미술관련 도록과 작픔 앨범, 미술잡지 등이 빼곡이 쌓여있다. 한쪽으로는 그동안 그린 風景그림이 차곡차곡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벽면에는 선생의 風景과 人物 그림 몇 점이 소박하게 내걸려 있다.
“어떤 분이 송용 화실하고 내 화실이 제일 지저분하다고 핀잔을 줬을만큼 좀 엉망이지요? 그래도 내가 필요한 자료는 다 찾을 수 있으니 그러면 됐지. 집사람이 가끔 청소한다며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고 하는데 나중에 찾느라 시간이 더 걸려요. 해서 그냥 이 상태 그대로가 좋아요. 있는 그대로 편하면 되지 않나요?” 그림 人生 60여년. 大學 卒業 이후 시작한 畫家의 길, 그리고 선택한 전업작가의 길과 뒤이어 찾아온 가난. 그럼에도 어느 한순간 후회하지 않고 한 길을 걸어온 고집과 뚝심. 뒤돌아보면 그렇게 평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한 눈팔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올 수 있음에 감사한다. 벗들은 대부분 떠났고 주위를 둘러보면 후배나 제자들 뿐 이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소박하고 온화한 성품 덕에 선생 주변에는 사람이 많고 이쪽 저쪽 가교역할도 곧잘 하곤 한다.
선생은 한마디로 자신에 대해 이렇게 평을 내린다.
“내가 사람은 좋은디 고집은 지랄같소. 한번 아니면 절대 아닌거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혹은 그림을 잘 팔기 위해 절대로 타협이나 야합 따위를 하지 않을 것 같은 선생의 고집스러운 모습에서 청정한 작가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가고시마 交流展을 성사시킨 장본인
선생은 7월말에 다녀왔던 日本 交流展 이야기부터 꺼냈다. “일본 센다이의 아마추어 클럽 화가 3명이 지난 5월에 光州에 왔는데 交流展을 하자는 거예요. 여러 가지 상황이 쉽지가 않을 것 같아 처음에는 못한다고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光州市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인데다 美術部門만 交流行事가 없다는 말을 듣고 보니 좀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래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들이 모두 수용해 추진했어요.”
이렇게 해서 光州日曜畫家會와 日本의 전국 규모 아마추어 畫家會인 처칠회의 創立 交流展을 7월 25일부터 일주일간 센다이시 市立美術館에서 가졌다. 光州에서는 회원 10명이 출품했고 日本에서는 70~80명의 회원들이 출품했다.
光州日曜畫家會와 선생의 인연은 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美術人口의 저변확대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美術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회원들을 모아 日曜畫家會를 창립했다.
그때 결성한 日曜畫家會가 오늘에 이어지고 있으니 이 모임에 대한 선생의 애정 또한 각별할 수 밖에 없다. 선생은 광주에서 소문난 日本통이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 가고시마 交流展을 성사시킨 장본인도 바로 선생이었다. 지금이야 수많은 交流展이 이어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日本과의 交流展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가고시마 交流展을 할 때면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것을 실감해요. 올해로 13회째를 맞았으니 韓日 文化交流의 장으로 이제 자리를 잡은 거지요. 10여년전만해도 交流展하자고 사정하고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성사시키는 일이 쉽지 않은 때지요. 센다이 交流展이 아마추어 작가들의 交流展이라면 가고시마 交流展은 無等美術大展을 중심으로 한 중견작가 이상의 交流展이니 성격은 다르지만 文化를 통한 兩國의 만남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요.”
日本人 친구에게 건넨 금잔화 한 점
선생은 日本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선생의 그림 인생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日本이다.
“일제시대에 농업학교 다닐 때 100명중에 20명은 일본 학생이었으니 한 반에 너댓명은 일본인 친구였지. 졸업 후 바로 解放이 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36년후인 76년도에 그때의 동기동창생들이 모교 구경하러 光州에 온다는 거예요. 해서 동기생들끼리 모여 歡待를 해주고 지나간 이야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돌아가는 그 친구에게 마땅히 줄 게 없어요. 당시는 그림이 잘 안 팔리던 시절이라 무척 가난했으니까.” 고민 끝에 그림을 선물하기로 했다.
“내가 너에게 줄 것은 그림밖에 없다. 액자에 넣어 주면 부피가 커지니 日本 가면 액자를 끼워 보관하라”는 말과 함께 금잔화를 그린 4호짜리 정물 한 점을 친구에게 건넸다. 당시 시청 계장으로 근무하던 친구는 日本으로 돌아간 후 과연 韓國人 친구가 준 그림이 소장가치가 있는지, 작품성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大家인 우찌노선생을 수차례 찾아가 마침내 그림 한 점을 그 앞에 내밀었다. 당시 66세로 日本 유명한 畫家였던 우찌노선생은 韓國에서 온 그림 한 점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우찌노선생과의 인연
"이 作家는 어디에 있느냐" "너하고는 어떤 사이냐" "이 그림은 최고의 액자에 끼워넣어라"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줄 수 없느냐"는 등 우찌노선생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日本人 친구의 마음도 함께 흥분되어 갔다. "우리가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우찌노선생은 그러면 10월에 함께 光州에 다녀오자고 만남 주선을 요청했다.
그해 10월, 친구와 우찌노 선생이 마침내 韓國을 찾았다. 선생의 畫室을 둘러본 우찌노선생은 4호짜리 1점과 15호짜리 1점 등 2점을 직접 챙겼다. 東京都美術館에서 열리는 日本의 美術團體 示現會 그룹전에 이들 두 作品을 出品하겠다는 것이었다.
묘하게 우찌노선생이 가져간 작품은 示現會에서 장려상을 수상했고 시간이 지나 상패와 상장이 도착했다. 日本과의 인연은 이렇게 작은 그림 선물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잊지 못할 生涯 첫 日本전시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日本에서 묵직한 서류봉투가 날아들었다. 당시만해도 海外 나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라 해외전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영사관을 경유한 공증서까지 들어있는 초청장 안에는 日本 夂留米連合文化會의 초청으로 77년 4월초에 당신의 個人展을 열테니 작품 30여점과 함께 직접 日本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日本에서 첫 個人展을 한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日本가기 전까지 서울을 40번 이상 오고 가야 했을만큼 고속도로를 발 닳아지게 다녔고 그림 30점을 싣고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 개막 바로 전날 日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달간의 비자를 받아 도착한 日本에서 선생은 유창한 일어실력으로 주위 사람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30여년이 더 지난 후에 하는 일어인데도 묘하게 말이 술술 잘 나와 공항 사람들조차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가져간 30여점 중 20여점이 팔려나갔고 日本의 언론에서도 대서 특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日本人 친구에게 그림 한 점을 준 것이 인연이 되어 日本 招待展까지 갖게 된데다 전시회도 성황리에 열렸으니 관심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한달간 藝術의 가교’ ‘本人 念願 첫 個人展’ ‘동급생 힘써 韓國人 畫家 友情의 個人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대대적으로 日本의 언론에 보도된 이 기사를 선생은 이제는 빛바랜 당신 앨범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자 선생은 ‘이왕 日本에 온 거 한달동안 日本 구석구석을 돌아보겠다“는 생각으로 한달 연장신청을 제출, 두달 간 日本에서 보내고 歸國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 시절, 日本에서 그림을 판 돈으로 無等山 자락 아래 땅을 샀다. 그 땅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소태동 집터가 됐다.
주머니 두둑해진 두 번째 日本 招待展
이후 78년 釜山 現代畵廊에서 招待展을 가진데 이어 79년에는 지역 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全南道 文化賞을 수상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사 놓은 땅에 집을 지어야지 마음 먹고 있는데 81년 日本에서 두 번째 초청장이 왔다. 島根縣立轉物館에서 개인전을 열테니 와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招待展에서는 가져간 그림이 모두 팔렸다. 日本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극찬했다. 그 때 번 돈으로 돌아와 집을 지었다.
그래서 선생은 日本人 친구들이 오면 지금도 농담처럼 말한다. “너희들 덕분에 가지게 된 집이다. 그러니 언제든 놀러 와라”하고. 나이가 들고 보니 더러는 아파트 생활이 편리하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흙바닥에서 살자”는 아내의 말이 맞다싶은데다 아파트에 작업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아 지금까지 이곳에서 눌러 앉아 살고 있다.
선생은 이후 20여년동안 60여차례 日本을 다녀왔다. 이제 웬만한 거리나 장소는 눈앞에 훤하고 日本文化에 대한 식견도 전문가 수준이다. 언어는 가이드보다도 뛰어나다. 선생은 “많이 다닌만큼 얻는 것도 많다”며 되돌아보면 그 두 번의 전시가 화가 인생을 사는데 많은 힘이 됐다고 말했다.
조선대 미술과 진학
1927년 함평에서 태어난 선생은 7대 종손으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창이면 창, 한시면 한시, 서예면 서예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藝人으로 어릴적부터 사랑채에서는 북장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藝術家의 길을 택함에 있어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해방전 본래는 東京으로 가서 문과나 미술과를 가려고 했으나 여의치않아 시기를 놓치고 해방이 된 후 서울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마땅한 美術大學을 찾고 있는데 어느날 신문을 보니 조선대에 미술과가 생겨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면접날 조선대에 가보니 30명 모집에 60명이 몰렸다. 머리는 장발에 옷에는 물감 자국이 사방에 묻어 있고 수염까지 기른 그야말로 대가처럼 차리고 나온 학생들이 여러명 눈에 띄었다. “나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입학 통지서가 왔다. 수석 입학이었다.
조선대에 입학한 후 두 분의 귀한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色彩美學의 선구자이자 인상파 畫風의 대가 오지호선생을 만난 것은 선생의 美術人生에 있어 큰 축복이었다. 스승이 타계하는 날까지 빛과 色彩의 美學을 고집했던 것은 藝術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잃치 않으려고 하는 조형이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선생은 스승의 숭고한 藝術情神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10살 연배인 김보현선생과는 한 집 식구처럼 지냈다. 스케치 여행도 늘상 함께 다니고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다보니 스승과 제자라기보다 동료같고 벗같은 그런 편한 사이가 됐다. 미국으로 국적을 옮긴 김보현선생이 37년만에 귀국해 가장 먼저 찾은 제자 역시 선생이었다.
42세에 택한 전업작가의 길
미술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어느날 박철웅총장이 선생을 불렀다. 부속중학교 미술교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거절하자 벼락이 떨어졌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승낙한 후 그때부터 학생과 교사라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월급받는 학생이 된 것이다.
1회 입학생중 졸업생은 단 1명. 바로 선생이었다. 학부졸업 후 조대부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바로 모교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강의 과목 선정 관계로 말다툼을 하고 1년만에 강단을 뛰쳐나왔다.
“애용해부학이라는 과목인데 가장 까다로운 과목이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뛰쳐나왔지.” 한동안 그림만 그리다가 광주공고에서 후한 대접을 해 주겠다며 강의 요청을 해와 다시 교직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항상 머릿속에서는 그림만 그리고 살아가는 생활을 꿈꿨다. 하루라도 빨리 교직을 떠나 그림에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숙명처럼 자신을 따라다녔다.
42세 되던 해, 더 이상 몸을 뺄 수 없는 시기가 오기 전에 결단을 내리자는 생각에서 미련없이 사표를 냈다. 지금도 전업작가로서 제대로 생활을 해나가기가 힘든 상황이지만 그 당시엔 더더욱 말이 아니었다. 작품을 팔아서 먹고 산다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림 그리는 것인데. 전업작가의 집념은 긴 가난의 터널로 이어져 1년도 채 안돼 전셋집으로 내려앉기 시작해 스무번도 더 이사를 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에 일본 초대전이 성사됐으니 일본에 대한 선생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서면 생략과 단순화로 재구성한 자연
선생이 즐겨 택한 소재는 자연이다. 화가 입문시절부터 즐겨 그린 주위의 풍겨은 평생동안 줄기차게 추구했던 미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초기 습작기를 사실주의로 풀발한 선생은 자연의 소재를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기본기를 보강하고 소묘력의 기량을 쌓았다. 수학시절 무려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석고대생 한 가지에만 매달려 파고 들었다는 초기의 집념이 오늘의 선생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선생의 풍경은 사진 찍듯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자연을 별도로 재구성해서 그것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다. 즉 밑그림이 그려지기 이전에 이미 머리속에 한폭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속이 캔버스 역할을 하는 셈이다.
대상에 대한 시선도 대범하며 화면의 생략과 감필, 소재의 단순화를 통해 최대한 절제한다. 군더더기같은 설명은 배제한, 이를테면 나열형이 아닌 생략형 화면이기에 선생의 풍경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흔히 보아온 남도의 풍경과는 또 다른 맛과 깊이가 있다.
대범한 자연관과 담대한 터치, 꼭 써야 할 곳에 요긴하게 들어가는 정감 넘치는 색체, 계속 덧칠해지는 두툼한 질감의 화풍 등 선생의 조형세계는 독특한 회화적 경지에 올라 있다. 윤기있는 붓의 촉감이 파도처럼 화면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진처럼 묘사하면 그게 사진이지 그림이예요? 캔버스라는 절대적인 세계속에 최선의 미를 창출해 내는 것, 즉 작가가 원하는 아름다운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한 그루의 나무, 흐르는 강물, 안개 낀 산봉우리 등 우리 눈에 비친 자연계의 모든 형상에는 관념이나 사상이 담겨있지 않지만 화가의 눈에 비쳐 묘사되는 자연계의 대상에는 작가의 개성과 시각, 이미지와 영감이 담겨있어요. 화가가 대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조형적 해석이 나올 수 있잖아요? 그게 그림의 원천이 되는 거지요."
대상과 자아, 물질과 정서, 실체와 느낌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선생의 작품은 넉넉하면서도 정겨운 정취가 풍긴다.
기초없이 건물부터, 요즘 새태 안타까워
요즘 서단에 유입되고 있는 서구화의 물결과 데포르메 추세에 대해서도 선생은 한마디한다. "철저한 기초 훈련을 통해서만이 비정형한 데포르메한 창조가 가능한 것이며 이미지나 앙포르멜도 반듯한 기초위에서 출발할 때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어요. 수학기에 아무리 지루하고 시간이 걸려도 기초공사를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기초없이 우선 화려한 건물부터 지으려고 하니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한때 "회화를 주도하고 있는 종합예술은 인상파 화풍"이라며 인상주의 화풍을 대변했던 선생은 이제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창작행위로 이루어지는 예술형식을 굳이 어떤 이즘이나 화풍이라고 하는 틀에 넣어, 꿰어 맞추는 것이 꼭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어요. 혹자에 따라서는 신자연주의, 신구상주의, 자기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화풍 등 얼마든지 이름 붙일 수 있잖아요? 용어상의 문제가 내용을 얽매이는 것 같아 창작 본래의 의미가 희석되는 느낌을 갖게 되거든요. 어떤 틀에 넣고 규정지우려 하는 게 창작행위에 큰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미의 영원한 터미널-구상회화
현대미술의 여파로 마치 구상회화가 한 물 간 형식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에 대한 선생의 생각은 확고하다. 선생은 과거 한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구상회화에 대한 평소의 소신을 밝혔다.
"시공의 연장선상에서 인류의 역사는 만들어진다. 오늘의 현대미술도 전통과 함께 역사속에 공존하고 있지만 오늘의 시공에서 일탈하면 이것 역시 전통이나 고전의 반열로 밀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영원해야 된다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불문율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로 통하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 램브란트의 자화상, 고흐의 해바라기 등 이 모두가 명화로 평가받고 있으면서도 아이러니컬한 것은 모두 한결같이 고전이요, 구상이라고 하는 에술의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미의 영원한 터미널은 구상회화라는 것을 확신한다." 선생은 "현대미술에서의 설치나 행위 등은 우리의 정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예술의 영원성에 배치된다"면서 단순한 의미만을 부여했다. "구상이나 사실주의가 고루하고 진부하다는 논리는 편견이예요.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새롭게 모색되고 있는 현대적 시각의 추상주의가 반드시 진취적이고 앞서가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독선이고요, 중요한 것은 표현양식상의 개념설정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지요, 개념은 그 이후의 문제이고."
연륜 더할수록 젊어지는 작품
선생의 작품의 특징을 미술평론가 김남수씨는 이렇게 평한다. "그의 작품세계가 때묻지 않고 연륜을 더 할수록 젊어지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은 진실에 접근하려고 하는 작업태도와 예술의 본령인 인간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미학적인 조형사상 때문이다. 김영태화백이 이라믐다움을 표출해 내는 최대의 강점은 색체의 미학이다. 색채의 뉘앙스나 조화, 배색과 대비 등 이 모든 것은 색채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의 작품은 깊고 두터운 마티엘과 함께 강렬한 색조의 사실화라기 보다는 차라리 이미지 회화에 가까울만큼 현대의 진수에 강점을 갖고있다."
선생의 색체감각은 여느 작가와는 다르다. 무등산을 벌겋게 칠한다든지, 하늘을 노랑색이나 붉은 색, 심지어 녹색으로 칠한다는지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의 현장개념은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하늘을 하나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전체 화면 구조속에서 어떤 색이 가장 맞을까를 생각해요. 전체 화면과의 배색과 대비, 혹은 조화를 생각하며 전혀 다른 색채공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하늘이라고 모두 하늘색이 되는 건 아니예요. 보여지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내 시각으로 재구성한 자연의 일부를 가져오는 작업이다보니 화면 전체의 톤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가장 먼저 고려해요."
선생은 녹색으로 처리된 통영의 하늘을 가리키며 해방과 색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언젠가 오랜 지기이자 스케치여행의 파트너였던 임직순선생과 정월 초에 무등산을 간 적이 있다. 선생은 이날 무등산 능선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임직순선생이 "야, 바로 이것이다"며 "붉은 색을 이렇게 적재적소에 쓸 수가 있느냐"며 감탄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임직순선생의 그림에서도 붉은 색이 곧잘 등장하곤 했다.
지구촌 곳곳 누비며 스케치여행
선생의 스케치 여행은 지역화단에 소문이 나 있다. 현장 사생을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산과 바다, 절을 그렸고 81년 구라파 미술여행을 시작으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외국의 수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93년 네팔 스케치여행과 북유럽 명국 미술관 순례, 94년 네팔 스케치 여행, 95년 구라파 및 아프리카 미술여행, 99년 인도 스케치여행, 2000년 네팔과 인도 스케치여행, 2001년 스페인 여행에 이르기까지 그림이 된다 싶은 곳은 두 세번을 가기도 했고 어떤 곳에서는 한달 이상을 체류하며 떠돌기도 했다. 바람처럼 물처럼 두리번거리며 이국의 풍물이나 그들의 또 다른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컸다.
"화가에게 있어 여행은 작품활동을 하는데 큰 양분이 돼요. 갈때마다 맛이 다르고 새로운 것이 보이니까."
풍경작업을 위해 처음에 택한 곳은 고즈넉한 들녘이 그림처럼 펼쳐진 농촌풍경이었다. 그러나 이후 산의 느낌과 깊이에 매료되어 10여년 가까이 산행을 하면서 각 절의 초입과 여름의 신록, 가을의 정취 등을 담았다. 선생의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산은 아기자기한 느낌의 산이 아니라 우람하면서도 선이 굵은 묵직한 느낌의 산이다. 한여름 녹음이 짙어가는 산사의 입구를 그린 그림이나 햇살 내리쬐는 초가을 농촌의 모습을 그린 사계 그림에서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따뜻한 정감의 색채와 호방하면서도 여유로운 구도속에 담겨있다. "스케치 여행 다녀와서 그림 두 점 팔면 여행경비가 빠져요. 밑지는 장사는 아닌 셈이지. 늘 새로운 것을 접하기 때문에 돌아다니다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좀 여유로워지고 자극도 받고 그래요. 그래서 기회만 오면 돌아다니고 기회가 오지 않으면 만들어서 가곤 해요."
선생은 풍경을 그린 이유로 "우선은 모델비가 공짜니까 언제든지 부담없이 그릴 수 있고, 어디든 자리를 잡고 앉아 스케치를 할 때면 신선이 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며 활짝 웃었다.
40년 동안 찾지 못했던 소재, 이제서야 보여
몇 년전부터 선생은 산보다는 툭 터진 바다가 좋아 바다를 즐겨 찾는다. 최근에 완성된 그림의 상당수가 해변을 끼고 있는 포구를 그린 작품이다. 고즈넉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멀리 보이는 바다 빛깔, 대상을 파고들지 않으면서 너그럽게 다루는 화가의 손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오랫동안 열심히 산을 다녔는데 요즘에는 육중하게 막힌 산보다는 툭 트인 수평선을 보는 것이 훨씬 가슴 후련해요. 파도소리를 듣는 기쁨도 크고 싱싱한 회도 먹을 수 있으니 장점이 많아요. 바다를 자주 찾게 되는게 아무래도 나이 탓이 아닌가 싶어요."
수년동안 가장 즐겨간 곳은 영광 법성포였고 그림 소재가 무궁무진한 여수와 아름다운 충무도 자주 찾는 편이다. 법성포를 찾으면서 선생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선생은 한 잡지에 기고한 '사고와 시각'이란 글에서 대상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과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지난 10년동안 법성포를 찾아갔지만 단 한점의 작품도 그려내지 못했다. 아예 그림의 소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그림을 두 점이나 그려와 사인까지 하게 됐다. 그 후부터 이곳을 즐겨 찾게 되었고 골목이며 언덕길 등 모든 곳이 작품의 소재로 꽉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법성포가 몰라보게 변한것도 아닌데 왜 옛날에는 그렇게도 없었던 소재가 지금은 얼마든지 있을까' 하고, 그것은 나의 생각과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들 생활속에서 보는 것, 든는 것, 먹는 것, 느끼는 것, 이 모두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시절에 별 맛이 없었던 것도 지금에 와서는 최상의 맛이 될 수 있고 별다른 흥취를 느끼지 못했던 판소리가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락의 무한한 흥취로 느끼게 된 것 등이 그러한 것이다."
법성포에 가면 앉을 곳이 많다. 어디든 자리만 잡으면 머리속에 이미 그림 한 폭이 그려진다.
"그림이라는 것이 화가의 눈이 얼마나 비옥해졌느냐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해요. 그렇게 좋은 장소를 대상을 보는 눈이 없어 보지 못했던 거지." 그래서 지금도 일요화가회 회원들에게 가끔 법성포를 가자고 제안하지만 "제발 선생님 그곳은 이제 그만 가자"며 얼굴을 찡그린다. 그럴 때면 "나는 법성포가 다 그림인데"하며 한마디를 던지곤 한다.
"제자들에게도 배우며 살아요"
사진작가가 대상을 미리 렌즈에 넣어보듯이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머리속이 1차적인 캔버스가 돼요. 이야기가 있는 구도가좋아요. 어떤 곳에 가서는 수십번 가면서도 한 점도 건지지 못한 곳도 있고 반대로 또다른 곳에서는 한자리에서 각도의 변화나 이동시점을 통해 수 많은 소재를 발견해 수십 점을 그려오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든 배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배움의 길을 열어놓고 살아야해요."
일요화가회원들과 스케치를 나갔을 때 스승인 자신이 아마추어 회원에게 배우는 일이 많다. "스승이 제자에게 배운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이 나이에도 야! 이건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했구나 하고 무릎을 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후배, 제자 누구에게나 영향을 받는다는 거지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작업실 화재
선생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말씀없이 한동안 침묵하던 선생은 작업실 화재 얘기를 꺼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화가에게 그림은 자신의 분신이자 전 재산이예요. 40대 중반때였는데 당시 충장로 화실 공간이 상당히 넓었어요. 해서 집에 있는 그림까지 모두 작업실로 옮겨두었는데 밤에 그 집에 그만 불이 났어요. 아침에 가서 보니 정말 붓 한자루 없이 몽땅 다 타고 재만 남았더군요. 아! 이건 신이 나더러 그림을 그만 두라는 신호다 하는 생각을 하고 기길로 고창 선운사로 들어갔어요. 젊은 시절 그림부터 20여년 가까이 그려온 내 분신이 하나도 없이 사라졌으니 그때는 정말 자포자기 상태였지요."
보름동안 그곳 스님과 생활하며 세상 생각을 접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미협 동료와 후배들이 자신의 그림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로 가장 왕성하게 작업하던 시절의 그림 전체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을 꼽는다.
"체념할 것은 빨리 체념하는 성격"
선생은 풍경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의 인물작업을 비롯해 탄탄한 기본기와 대상에 대한 직관력이 넘치는 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그렸다. 그럼에도 풍경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보니까 "김영태는 풍경밖에 못그린다"는 얘기가 들린다.
"요리사가 수제비만 만드나요? 칼국수도 만들고 팥죽도 만들고 그러지."
선생에게는 한 가지 철칙이 있다. 어디가서 "나 그림 그립네"하는 태를 내지 않는 것. 당시만 해도 예술인의 돌출적인 행동거지가 "예술인이니까"로 묵인되던 시절이었다.
"30, 40대까지만 해도 스케치 여행을 갈 때면 서류가방에 화구를 넣고 신사복을 입고 다녔어요. 누가보면 외국이나 나갈 것 같은 그런 복장으로," 공모전에도 출품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한 그림으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자신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체념할 것은 빨리 체념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걱정하는만큼 손해니까 그냥 여유롭게 생각하며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게 정신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 후 생활이 궁핍했을 때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체념 때문이었다.
"작품 소장자 찾고있어요"
선생은 자신의 예술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그린 작품의 소재를 찾고 있다. 소장자가 누구인지 확인이 된 작품도 많지만 과거의 작품중 상당수는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술세계 등 미술전문지에 오랫동안 광고도 하고 백방의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아직껏 신통치않다. 혹시 소장하고 있는 분은 연락을 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원로답게 지역 미술계에 남긴 선생의 역할도 크다. 89년부터 3년동안 제13대 광주미협 지부장을 맡았던 선생은 유명무실했던 미협을 본 궤도에 올려 놓았고 사무적인 틀을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미협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광주미협 회보 창간회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미술실기대회를 만들었다. 또 9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백두산 답사위원"으로 선정돼 김옥진, 오승우, 김숙진씨 등 내노라하는 화가 17명과 함께 백두산을 탐방, 91년 2월에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백두산 실경전"을 갖기도 했다. 당시 선생이 그린 '백두산 천지' 작품은 동아일보 1면에 칼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전남도전과 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맡는 등 광주와 서울로 이어지는 활발한 화단 활동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이 정도면 幸福한 人生”
선생은 5녀 1남을 두었다. 딸 다섯은 모두 美大로 진학했고 아들만 컴퓨터공학과에서 박사코스를 밟고 있다.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며 택한 길이었다. 지금은 作品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둘째딸 두례씨만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화력 60년.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선생의 人生은 幸福하다고 자부한다.
“친구들 대부분이 저 세상으로 갔고 살아있는 친구들 또한 정년 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방안퉁수로 지내고 있어요. 그에 비하면 나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내 작업실에서 언제든지 그림 그릴 수 있고 바람 쐬고 싶으면 스케치여행도 다닐 수 있고 이 정도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그림 그리는데 지장이 없는 생활적 여유만 갖춰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선생은 “건강하고 내가 좋아서 택한 길이니 후회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畫家는 作業 成果로 승부해야”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요즘 후배들 보면 너무 서둘러요. 빨리 출세하고 싶어, 이름 알리고 싶어 조급해 하지요. 그러나 畫家에게 중요한 건 本人이 만족할만한 작업적 성과예요. 내가 열심히 해서 좋은 작품 그리면 서두르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밖에서 인정을 해 주는 법이예요. 내 자신을 먼저 다지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있었으면 해요.”
“畫室이 作家의 精神世界를 쏟아 붓는 장소가 되어야지 공장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선생은 “지금도 작품 하나 가지고 며칠씩 씨름하기도 한다”며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꼭 이루고 싶은 한가지 꿈이 있다면 그동안의 작업성과물을 집대성한 畫集을 發刊하는 것. 그러나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아직은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돌아서는 길, 그림에 배한 변치 않은 정열과 藝術魂으로 그림인생 60년을 일군 선생의 순수한 삶이야말로 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운 藝術作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