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열白悅 김영태金永太 화백畵伯이 망구望九에 이르러 처녀 화집을 내야겠다며 내리시는 말씀.
또래들이 죄다 떠나고 없어 아쉼 끝에 생각해 낸 게 기왕 애물단지인 네(손철)게 낙점했으니 사양못하고 정성껏 서문序文을 쓰기로 한다.
거역을 잊은 몰골 과만한 짐을 똘똘 몰아 주제넘는 짓임이 뻔한데도 야위고 가냘픈 두 어깨에 덥석 짊어진 꼴이 되고 말았다.
언제부턴지 화백의 바깥나들이가 잦기에 행여 숨겨 논 애인이라도? 하며 미심쩍어 했었는데 알고보니 그의 그림은 이곳에서보다 일본日本의 구루메 九留米, 마쓰에松江,
요나고米子 등지等地에서 개인전個人展을 통해 아사히朝日, 요미우리讀賣, 마이집니찌每日 등 유명언론을 비롯 기타 지방 신문에까지 대서특필大書特筆되어 있었고
이곳에는 한마디 소문도 없이 프랑스, 러시아, 중국, 불가리아 뿐이랴. 독일에서는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시장市長 등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고,
미국에서도 초대작품이 전시되었으니 말대로 개선장군凱旋將軍의 묵묵한 행진이 밖에서가 안에서 보다 한결 당당하였다. 본시 우리나라의 유명 작품은 모름지기
외국으로부터의 역수입이라야 한다는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폐습弊習 그대로였다.
이 분의 인품人品이나 듬직한 용모뿐 아니라 그의 작품마저도 한마디로 두터울 후厚 자字 만이 가장 제격일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그의 모든 면에서 인간적인 중후감重厚感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연찮게 햇볕이 연하게 스민 이 분의 화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캔버스를 차분히 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제사 연신 무릎을 쳤다.
쪼께 건방진 소리 같지만 얼른 보기엔 그림마다 짗게만 보였던 색체 바닥 밑 깊숙이 깔려 있는 그가 늘 주창하는 인상파적印象派的 감성感性을 비로서 느끼게 된 까닭이리라.
그러다 보니 후厚한 듯 싶기만 했던 그림 밑바닥 깊이 깔려 댓생의 흔적마저 말끔히 빨려들어 감추어 진 듯 보이지 않는 이 분의 섬세한 솜씨를 가까스로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되풀이 컨데 흔적조차도 말끔히 빨려있는 너무라도 숨겨진 이른바 인상파적印象派的 장르를 완연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분의 작품은 모름지기 태양 광선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내 느낌이 어쩜 고정관념固定觀念처럼 되어 버렸다.
결론인 즉 두터울 후厚에다 백색白色의 즐거움悦을 겹쳐놓은 예술이 바로 김영태金永太 화백의 임품이며, 예술이고 또한 철학이란다면 내 주제넘는 사설일까 싶으면서도 미수米壽가
내일 모레인 노구老軀의 애물단지 노릇이나마 제대로 했겠는지 모르겠다. 멀리 그가 바라보았을 짙푸른 쪽빛 동해바다를 아련히 이매진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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